재작년 말,
허리를 다쳐 며칠 누워 지낼 때
"비포 선라이즈"라는 아름다운 영화를 봤습니다.
셀린느(줄리 델피)와 제시(에단 호크)라는 청춘남녀가
유럽횡단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밤 새도록 비엔나 거리를 배회하며 재잘대다가
해 뜨기 직전에 헤어진다는
한 여름밤의 꿈 같은 내용이었는데, 나누는 대사마다 예술이었습니다.
개봉한지 18년된 옛날 영화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고 싱그러웠습니다.
내친 김에,
같은 배우와 감독이 9년 뒤 다시 만나 종일 파리를 돌아다니며
이번에는 해 지기 전까지만 수다를 떠는 "비포 선셋"도 봤고
또 다시 9년 뒤, 그러니까 처음 영화를 찍은지 18년 만에,
역시 같은 배우들이 그리스의 해변을 거닐며 이제는 중년의 현실적 대화를 나누는
"비포 미드나잇"마저 다 봤습니다.
전부 좋았습니다.
세편 모두 각각의 매력이 있지만,
오늘은 갑자기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을 소개하고 싶어졌습니다.
셀린느와 제시가 비엔나의 밤거리를 거닐다 "조르주 쇠라"의 드로잉 전시회 포스터를 발견하는 장면인데,
아시다시피, "조르주 쇠라"는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로 유명한 점묘파 화가입니다.
셀린느 : 이 그림, 몇년전에 미술관에서 본 적 있어. 보고 또 보고...눈을 뗄 수 없었지.
45분은 봤을 거야. 철길, 대단해!
셀린느 : 사람이 배경에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아
셀린느 : 이것 봐. 환경이 인물보다 강한 것 같아!
셀린느 : 인간의 모습이 무상해... 덧없지?
영화를 볼 때,
대사가 하도 많아 자막으로 셀린느와 제시의 감정선을 따라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영어 못하면 이럴 때 불편합니다.
그러나 자막 읽느라 바쁜 중에도 "쇠라"의 그림 앞에서 생각이 멈춰졌습니다.
사실 "쇠라"의 그림들은,
멀리서 보면 선처럼 또렷하지만 가까이 들여다 보면 수 많은 점과 점과 점으로 찍혀,
어느 하나 분명한 형태 없이 여러 색이 교묘히 혼재합니다.
붉은 색을 자꾸 보면 명랑한 푸른점이 섞여 있고
푸른 부분을 깊이 보면 우울한 갈색점이 숨어 있습니다.
그건 우리들 사는 모습과 같아서
"사람이 배경에 스며드는 것 같다"라는 말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겁니다.
그렇지요.
매일 좋을 수 없고 늘 나쁠 수 없는데
좋은 날 가운데 힘든 시간이 섞였고 나쁜 날 속에 기쁜 순간이 없지 않으니,
흑과 백을 가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백퍼 옳다고 여겼던 일조차 다가가 확인하면 아닌 경우가 허다한데
하물며 멀리서 대충 보면 얼마나 오해가 많을까요.
검다고 단정하고 욕을 적어 보냈는데
실은 붉은점과 푸른점과 노란점이 뒤섞여 찍혔을 뿐,
알고 보면 쇠라의 그림이 그렇듯 검은 점은 단 한개도 없을 때,
난감하겠지요.
시간이 남은 오후,
보고 싶은 것만 보고나서 혼자 만들어 낸 확신의 위험에 대해
생각이 나기에 말입니다^^
첨부하는 노래는 이적의 "비포 선라이즈"입니다^^
<2015년 3월 25일 젊은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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