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추억
엔화 더럽게 비싼 이 시국에 일본엘 놀러가는 대담한 친구가
내 카메라 렌즈를 빌리러 왔다.
이번에 빌려 써보고 맘에 들면 지르겠단다.
그리하여 내 이쁜 캐논 17-55 표준 줌 렌즈는 현재 일본 여행 중이시다.
따라서 졸지에 눈 잃은 나의 450D는 사무실 책상 옆 장식품으로 승진했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일 없이 퇴근 못하는 이 밤,
바쁜 척 그러나 실은 한가한 주인의 눈에 띄었다.
불현듯 작년 이 맘 때가 떠올랐다.
캐논 10D, 이른바 DSLR을 선물로 받게 되는 역사가 있었다.
물론 한참 쓰던 중고였고 버릴데 없어서 너 준다는 친구에게 나는 약간의 성의 표시를 했다.
싼지 비싼지는 전혀 몰랐고 달라는대로 30만원.
카메라를 넘겨 받는 자리에서 난 물었다.
렌즈는?
일, 이초쯤 침묵이 흘렀나?
명랑한 목소리로 렌즈는 별개란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유행가 가사구나...
암튼 고백컨데 이 나이 먹도록 SLR 이란게 렌즈가 분리되는 카메라라는 걸
난 몰랐다.
만져본 것도 그 때 그 구로동 삼겹살 집이 첨이었다.
남대문 가서 렌즈를 샀고 며칠 뒤 산악회를 따라 영암 월출산엘 갔다.
열심히 사진을 찍는데 이상하게 사람들 얼굴만 찍혔다.
뒤로 뒤로 더 뒤로 아예 달음질을 쳐도 전신을 잡기 힘들었다.
근사한 풍경이라고 들이대면 나무나 돌은 찍히는데 산은 담기질 않았다.
그날 내가 가져간 단 한개의 렌즈는 85mm 단렌즈.
산에 다녀온 다음날,
서점 가서 책 사다 읽으며 바보처럼 비실비실 혼자 웃었다.
알고보니 어처구니 없는 렌즈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몇가지 렌즈를 더 샀고 산에 갈 때마다 열심히 찍었고 즐거웠다.
그러다 얼마 전 첫사랑 10D 를 떠나보내고 작고 가벼운 450D를 새로 모셨다.
바꾸는 김에 렌즈도 사뭇 좋다는 놈으로 얹었다.
친구에게 빌려준 17-55 줌 렌즈가 그것인데 전에 쓰던 탐론 28-75 렌즈보다 세곱은 비싸다.
당연하지만 사진이 세배로 좋아지진 않았는데
대신 장비욕심과 겉멋이 삼십배 늘었다.
이 대목에서 만레이의 <앵그르의 바이올린>이 떠오른다.
1924. 은염프린트. <앵그르의 바이올린> Man Ray
만 레이(1890 ~ 1976)은 미국의 아방가르드 사진가이자 화가이다.
이 양반,
지 애인을 프랑스의 화가 장 오귀스트 앵그르의 <발팽송의 욕녀>와 비슷하게 앉혀놓고 찍은 사진 위에
바이올린 마크를 새겨넣었다.
여자는 악기라는 의미겠다.
그런가?
남자의 연주 실력에 따라 명기도 되고 흉기도 되고 소리의 떨림이 달라지는,
여자는 아름다운 악기인가?
악기 탓 그만하고 제 연주실력을 돌아보라는 메세지인가?
저 뿌연 사진, 설마 내가 가진 450D 와 17-55 렌즈보다 더 좋은 장비로 찍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캘리포니아의 폴 게티 미술관에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