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도 사랑을 한다.
요즘 격주 토요일마다 백두대간을 걷는 재미에 깊이 빠져 있다.
물론 개별의 명산을 하나씩 올라보는 것만큼 화려하고 감동적이진 않다.
하지만 지리산을 내려와 전라도 남원을 지나고 경상도 함양 땅까지 4회에 걸쳐 걷는 동안,
명산이라 이름 붙은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작고 소중한 기억들이 적금처럼 쌓여가는 즐거움도,
명산의 정상에 발 딛는 상쾌함 못지 않았다.
잔잔히 퍼지는 여운은 오히려 더 긴지도 모르겠다.
대간 길에서 얻는 기쁨은 여러가지지만 그야말로 몸으로 부대끼며 만나는 나무들의 이야기를 빠뜨릴 순 없다.
위도와 표고와 경사면의 방향과 토양에 따라 각기 다르고 무엇보다도 계절의 진행을 쫓아 언제나 새롭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걷고도 이토록 다른 모습인데, 북으로 자꾸 걸으면, 겨울이 더욱 깊어가면, 고도가 한층 높아지면,
눈이 오고 상고대가 달리면, 새로 봄이 찾아와 꽃이라도 열리면, 잎이 돋고 파랗게 물이 오르면,
녹음이 풍성하게 번지면, 단풍 들고 열매 맺고 낙엽 지면, 때마다 철마다 저마다 빛나고 또 스러질텐데 어찌 감탄을 막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 먼저 설렌다.
지리산 자락에서 흔한 것은 소나무다.
쌓인 솔잎을 밟으며 솔향 사이로 걸으면 저절로 청아한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양지쪽 능선에선 철쭉밭이 빼곡하다.
자주 손등을 할퀴는 철쭉의 잔가지는 가지말라고 매달리는 소녀처럼 작지만 뻣뻣하다.
대간길에는 하얗게 파도치는 억새밭도 많다.
바람 결에 속절 없이 흔들리고 바람따라 쉽게 눕기도 하지만 바람이 지나가면 천연스레 되서서
새로운 바람을 기다리는 억새는, 원숙한 여인을 닮았다.
아직 굵지 않은 참나무들도 도열하여 길을 터준다.
참나무를 부르는 이는 많지만 사실 콕 찝어 참나무는 없다.
크게든 작게든 도토리가 열리는 몇몇 나무들의 총칭이기 때문이다.
떡갈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여섯종의 도토리 육형제를 통 틀어 참나무라고 부른다.
지금은 남쪽지방을 걷고 있으므로 산죽은 원없이 만지고 스친다.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은 차령산맥이라니 조금 더 걸으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대간길은 분수령을 따라 걷는 길이다.
마루금(능선)을 경계로 수종이 확연히 달라지는 모습을 자주 본다.
나무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 사는 모습도 달라진다.
산의 왼쪽은 전라도 장수고 오른쪽은 경상도 함양이다.
무진장 오지라는 무주, 진안, 장수와 낙동강을 경계로 좌강안동 우강함양이라 불리는 자부심 높은 함양이다.
나무들과 인사하며 걷다보면 참으로 다양한 표정을 본다.
새초롬히 고개 숙인 나무도, 당당하게 가슴 내민 나무도, 저들끼리 모여 새살거리는 나무도, 솟구치는 욕정을 솔직히 내보이는 나무도 있다.
둘이 하나되어 이리 휘고 저리 굽고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나누며 다정이 병인 나무도 있다.
본래 둘이었으나 서로 기대어 부비는 동안 점차 하나가 되는 나무도 있다.
'연리지'라 한다.
그런가 하면, 쉽게 하나가 되었지만 이내 실망하여 비틀고 쳐내고 붙들고 꼬다가 결국,
각자의 햇살을 쫓아 갈라서서 맘 편해진 나무도 보인다.
무뚝뚝한 껍질일망정 정답게 나란한 굴참나무 둘 사이로 매끈한 어린 가지 하나가 고개를 디밀고 자리한다.
굴참나무 둘은 조금씩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어린 가지의 보드라운 감촉을 거부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다른 나무에 얹혀 살아가는 나무도 있다.
저는 혼자 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칭칭 감고 구속을 한다.
아직 어린데 정 주고 마음주고 사랑도 주고 몸까지 다 내준 나무가 바로 곁의 언니나무처럼 반듯하게 자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근본은 어쩌지 못하나 보다.
아무리 울고불고 집착하고 꽁꽁 동여매고 살을 파고 들어도
자랄 씨는 쑥쑥 자라고, 평생 그러고 살 씨는 그러고 산다.
아예 다른 나무의 속에 자리잡은 염치없는 나무도 봤다.
맘 허전하다고 가슴 속에 아무나 함부로 들여놓을 일이 아니다.
한번 두번 놀러왔다가 주저앉아 안떠나면, 빼도 박도 못하고 팔자려니 품고 살아야 한다.
속이 타든지 썩든지 말이다.
나무 장가보내기.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벌어진 가지를 더욱 벌려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한다.
헉.....-.-;;
못된 송아지는 엉덩이에 뿔 나고 성격 급한 나무는 남들이 장가 보내주길 기다리지 않는다.
나무들도 사랑을 한다.
백두대간 마루금을 걷다가 길섶에서 잠시 땀을 식히노라면 나무들이 부르는 사랑노래가 부시럭부시럭 들려온다.
※ 사진은 대부분 지난 토요일 백두대간 제 4구간(총 46구간) 광대치 주변에서 찍었다.
※ 백두대간 4구간 : 복성이재 - 치재 - 꼬부랑재 - 봉화산 - 경상도 진입 - 광대치 - 월경산 - 중재 - 중고개재(총 14Km)